내 글씨

1. 어릴 적, 나는 궁서체와 바탕체의 중간 정도 되는
거의 붓글씨라 해도 다름 없는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엄한 교육관(우리 어머니는 교육은 정말 엄하셨다;;;)으로 인해
글자는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기 때문.

초등학교 때 글씨로 상도 여러 번 받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나눠 주는 '글씨 따라쓰기'의 용지속 글씨체나
내 글씨체나 다를 게 거의 없었기 때문.
그러나, 난 그 글씨체를 '그리기' 위해 시간을 엄청 많이 들여야 했으며
내 필기속도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엄청나게 느릴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여자 짝꿍의 글씨체를 보고 깜짝 놀랬던 기억이 난다.
글씨가 마치 만화 캐릭터처럼 움직이고 있었고 너무나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내 글씨는 억지로 빚어낸 듯한, 약간은 불편한 느낌까지 가지고 있어서
순식간에 내 글씨에 대한 자부심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쓰는거야?"

그 짝꿍은 별 다른 말은 안 해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냥... 글씨를 둥글게 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얘기를 해 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다만 변화가 있었다면, 나는 그 날 이후로 짝꿍의 글씨체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


2. 내 글씨체는 점점 요상해져만 갔다.
붓글씨에 가까운 글씨에서 여자 아이들이 즐겨 쓰는 둥글둥글한 글씨체로 전향되어 가다 보니
이건 뭐... 글씨가 써 있는 곳마다 모두 다른 필체를 갖기 일수였다.

내 글씨가 겨우 자리잡은 건 고등학교 때.
이제서야 더 이상 어떠한 변모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그나마 안심하게 된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이미 너무나 여성스러워진 내 글씨체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그냥 이대로 평생을 살아야겠다는 체념 아닌 체념을 했다.

그 상태로.. 지금까지 왔고
여전히 사람들은 내게 '여자 글씨같다'라는 말을 한다.

괜찮다.
그냥... 내 글씨를 보면, 남들은 모르는 어떠한 내 인생의 변천사가 녹아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나의 일부처럼 생각하며 지낸다.


3. 하지만...
더 나이가 들면
글씨체가 좀 어른스러워져야 할텐데 -_-;;;;;